작품소개
“그대가 패트리시아 왕녀인가.”
국왕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말을 걸자 패트리시아는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직접 말을 걸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내심 몹시 동요했다.
필립 왕은 깊숙이 머리를 숙인 패트리시아 앞까지 다가오더니 깊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을 겪었을 테지. 이번 전쟁은 참으로 유감이구나. 라돌프 황자가 살아 있었더라면 화해의 길도 남아 있었을 테지만…… 부디 그레이엄 왕을 원망하지 말아 다오.”
“물론입니다!”
패트리시아, 티아는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순간적으로 국왕을 올려다보며 열심히 목을 울렸다. 그녀에게 그레이엄 왕은 이미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황제에게서 조국을 구한 영웅이었다.
“아바마마를 막지 못했던 무력한 제가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시녀와 유모에게까지 자비를 내려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하게 짓눌린 목소리를 띄엄띄엄 밀어낸 직후 격렬하게 콜록거렸다. 순간적으로 입을 덮은 손수건이 선혈로 물들었다.
“무리하지 말라! 클로드, 서둘러 의사를 수배해라. 약간이지만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치료하면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네, 폐하. ……그럼 방금 말씀드린 그 건은.”
“전부 네게 맡기마. 리세아네도 잘 타일러 두거라.”
“알겠습니다. 폐하의 온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화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부자의 끈끈한 인연은 전해졌다.
신뢰와 애정으로 맺어진 관계가 눈부셨다. 아바마마도 이런 분이셨더라면…….
목의 통증을 참으면서 국왕을 올려다보는 패트리시아의 어깨에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필립 왕의 온화한 검회색 눈동자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앞으로 그대는 왕궁에서 일하게 된다. 신분도 과거도 버려야 하지. 하지만 백성을 염려하여 진언했던 그대의 마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훌륭하구나.”
‘――과분한, 말씀입니다.’
진심 어린 위로에 가슴속 깊은 곳이 떨렸다. 일국의 왕에게서 훌륭하다고 칭찬받았다.
패트리시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건조한 뺨을 적셨다. 얼어붙어 있던 마음에 눈물이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클로드는 무릎을 꿇고 패트리시아에게 새 손수건을 건넸다.
“오래 기다렸으니 피곤할 테지. 쉬게 해 주고 싶지만, 그 전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말해도 괜찮을까?”
사양하는 패트리시아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준 클로드가 그대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대답하려는 패트리시아를 보고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한동안 목은 쓰지 마. 고개를 움직이기만 해도 돼.”
자애로 가득한 클로드의 배려에 패트리시아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찬탈자는 악마의 탈을 쓴 상냥한 귀공자였다.
타인의 호의에 익숙지 않은 패트리시아는 여행하는 동안 계속 완강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클로드는 싫은 기색 한번 보이지 않고 그녀를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흘러넘칠 듯한 감사가 가슴속에 벅차올랐다.
패트리시아는 그의 친절에 부응하고 싶어졌다.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 뒤 괜찮습니다, 하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감사합니다, 도 덧붙였다.
클로드가 아름다운 제비꽃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패트리시아는 그가 말문이 막힌 걸 처음 보았다.
클로드는 감사로 가득 찬 패트리시아의 눈동자에 못 박혀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원정 기간 동안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감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레이엄 왕에게 얕보일 수는 없다. 10살 차이도 나지 않는 그가 동맹을 맺은 상대는 클로드의 아버지다. 이번 전쟁에서 무용을 보여 그레이엄에게 자신의 힘을 인정하게 해야 한다. 클로드는 굳게 결의하고 출정했다.
살리아데는 풍요로운 나라다. 그렇기에 서쪽 나라에서 계속 살리아데를 노린 것이다. 펜돌이나 라벤느 등 유력한 동맹국이 곁에 있기에 겨우 그걸 저지하고 있다. 자신 대에서 역대 국왕의 쌓아 올린 평화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클로드의 어깨에는 이미 살리아데 국민 전체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사실은 패트리시아를 구하지 말았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황폐한 나라와 잃어버린 백성을 애도하며 마지막 청산을 하려던 불우한 황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마차 안에서 쭈뼛쭈뼛 몸을 기대던 패트리시아의 야윈 어깨 감촉을 떠올렸다. 마치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처럼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그녀가 행복해지길 원한다. 지금까지 고생했던 만큼 더 커다란 행복을 느끼기를.
――내가 패트리시아를, 아니, 티아를 지켜야 해. 클로드는 다시금 결의했다.
*****
“언젠가 그대를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 주었으면 한다.”
멸망한 나라의 황녀 패트리시아와 그녀를 구한 인근 나라의 왕태자 클로드.
맺어지지 못할 운명이건만 사랑이 깊어만 가는 둘을 보며, 클로드의 동생 리세아네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고…….
한편, 리세아네는 대국의 황제 그레이엄과 결혼하며 페트리시아를 시녀로 함께 데려간다. 그곳에서 리세아네는 그레이엄과의 사랑이 이어질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지만 그는 열네 살 차이가 나는 어린 정략결혼 상대인 왕녀를 어린애 취급한다.
그러나 순수하고 총명한 왕비가 되고자 하는 그녀가 점점 사랑스럽게 보이고.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 밤에 너를 갖도록 하지.”
나이 차 정략결혼과 이루어질 수 없는 왕태자의 사랑.
두 왕녀가 펼칠 달콤한 왕궁 러브 로맨스.
슈가처럼 달콤하고 강렬한 TL 소설
슈가 노블 SUGAR NO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