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7년이면 충분하지 않아?”
“……뭐가?”
“네가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기에?”
비극적인 화재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태평.
악몽에 갇혀 살던 그는 어느 날, 봄볕 같은 소녀를 만난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 로지.
태평은 오직 그녀 곁에서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널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김태평의 세상은 오로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태평아. 나, 너랑 그만하고 싶어.”
하지만, 로지는 갑자기 나타났던 그날처럼 예고 없이 이별을 전한다.
그 후 숨도 쉴 수 없었던 7년.
태평은 로지를 되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다.
* * *
“오랜만이에요. 오로지 선배님.”
로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태평이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것도, 그가 티끌 한 점 없이 맑게 웃고 있는 것도.
“왜…….”
여기에 온 거냐고 물으려던 목소리가 어깨를 감싼 코트에 의해 삼켜졌다. 고개를 떨군 로지는 망토처럼 걸쳐진 옷을 바라봤다. 머뭇거리다가 코트를 벗으려던 순간이었다. 훈훈한 온기를 품은 옷과 달리, 싸늘한 음성이 로지의 귓가를 스쳤다.
“그냥 입고 있어요.”
“…….”
“이번에도 버리면 용서 안 할 테니까.”
로지는 태평을 멍하니 바라봤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옷도, 이 꽃도.”
커튼 속에 숨겨 두었던 꽃다발을 꺼낸 태평은 그걸 로지에게 안겼다. 피처럼 붉은 장미꽃을 떠안게 된 로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모든 게 사라져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하지만 그 소원은 얼굴에 닿는 뜨거운 체온에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볼을 건드리는 손끝에 놀란 로지가 감았던 눈을 떴다. 태평은 로지의 얼굴을 만졌던 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지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걸, 그도 확인해야겠다는 것처럼. 착잡함이 묻어 있던 태평의 얼굴에 희미한 열기가 오르더니, 그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리고 나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입고 있는 옷에서 꽃향기보다 더 뚜렷한 체향과 차디찬 향수 냄새가 섞여서 났다. 어렸을 적의 태평에게서 맡아 보지 못했던 그 쌉싸름한 향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