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16살 때 사고를 쳐서 결혼해 버린 서지와 우민.
유일한 어른인 우민의 어머니, 미순에게 용서를 비는 16살처럼 살아온 세월이 17년이었다. 너무나 잘 커 버린 딸 지민이는 17살에 유학을 떠나고,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서지에게 ‘엄마, 이혼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그 말을 필두로 어쩌다가 갑자기 어영부영, 마치 17년 전 갑자기 결혼이 다가왔던 그 날처럼 갑자기 이혼이 닥쳐왔다. 그러면서 우민과 정 반대의 성향에 있는 새로운 남자, 진산이 그녀의 인생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그 이후 서지와 우민은 16살 이후로 멈췄던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동안 뒤로 미루기만 했던 성장을 하게 된다. 지민의 부모가 아닌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성인으로서, 다른 특징과 매력을 지닌 이성으로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과연 서지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게 되고, 결국엔 어떤 남자를 선택하게 될까?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불완전한 행복을 찾아가며 성장하는 잔잔하고 가슴 찡한 이야기.
- 본문 중에서
“지민이가 그런 말을 했을 때에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너무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그렇게 살았으니까. 사실은 삶에 지쳤으면서도 더 생각하기 싫었어. 더 생각한다는 건 우리 젊은 날 17년을 부정하는 거고, 실패를 인정하는 꼴이니까. 그런데…….”
“…….”
“너와 헤어지고, 나는 아주 많이 생각했어. 너는 입원하랴 수술하랴 바빴겠지만 나는 남는 게 혼자만의 시간이었거든. 나에 대해서도, 너에 대해서도, 지민이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어.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결론이 나왔어. 생각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했던 거야. 너는…… 지금 그 과정이 없어서 허둥지둥 하는 거야.”
서지는 더 이상 말해도 우민이 아무 말 없을 것임을 알았다. 생각에 깊이 잠긴 얼굴은 그 동안 그녀가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그 다음은 우민의 몫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마지막에 그렇게 나를 생각해준 건 고마워. 어쩌면 네가 그런 남자라는 걸 속으로는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든 나날들을 계속 살아 왔던 걸지도 몰라.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지민이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계속 살았을 지도 모르지. 언제나 그랬듯 생각을 멈춘 채로 말이야.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녀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무심해서 몰랐겠지만 나는 딸이 이혼하라고 할 만큼 불행했고, 그렇게 우리 17년은 실패했어. 그걸 받아들이고, 너도 많이 생각해봐. 모른 척 했을 뿐이지 사실 알고 있었던 것들이니까. 네가 ‘그쯤이야’라고 생각했던 집안일들, 넘겨버리면 된다고 했었던 어머님의 잔소리들, 큰 일 아니라는 이유로 언제나 견뎌야 했던 네 무관심이 내게는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까 나는, 그 실패한 결혼 생활로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어.”
(중략)
“그러면…….”
진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강릉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강릉에 커피 거리도 있고 명인도 많다고 들었거든요. 안 그래도 저도 속이 답답해서 바다 한 번 보고 올까 했었는데 주말에 시간 길게 잡고 한 번 같이 갈래요?”
“와…… 선생님, 그런 건 다 어떻게 아세요?”
서지는 감탄해서 중얼거렸다.
“진짜 마법사 같아요. 뭘 말하면 바로바로 갈 길을 알려 주시니까…… 저번에 파스타 집도 맛있는 집 딱 데려가주시고…… 진짜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죠?”
진산은 칭찬이 기분이 좋은지 씩 웃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때 말했잖아요.”
“네?”
“좋은 독신주의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진산의 눈이 깊어졌다. 언뜻 쓸쓸해 보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처럼만 지내주면 돼요.”
(중략)
인간인 이상 고유의 결핍은 있을 수밖에 없고, 극복은 못하더라도 직면은 할 수 있어야 주체적으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메이크업을 모두 지운, 수수한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한심해도 괜찮아. 그녀는 중얼거렸다. 약해도 괜찮고, 외로워도 괜찮아. 그런 나라도, 행복할 수 있게 내가 노력할게. 남들이 보기에 바보 같은 성향이라고 할지라도, 이해 못한다고 짜증낼지라도, 결국 내 행복에 가장 관심 있는 건 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