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젊고 똑똑한 여교사 정윤과 그녀를 동경하던 학생 중 하나였던 현.
평범한 사제 관계였던 그들의 관계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크게 흔들린다.
기회주의자인 부모와 연을 끊을 정도로 굉장히 자신의 주관이 강한 정윤이지만,
어쩌다 보니 단둘이 피난길에 나서게 된 후 자꾸만 남자로 다가오려고 하는 현이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내가 네 살 어린 것도, 네 학생이 된 것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어. 그래도 나는 줄곧 너만을 선택해 왔어.’
역사 속에서 그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고, 극복해야 할 것도 너무나 많지만, 그 사이에서 항상 서로를 선택하며 끈질기게 살아가고 사랑하는 이야기.
- 본문 중에서
“너랑 나, 두 달 동안 부산까지 오면서 죽을 고비를 계속 넘겼어. 밤마다 함께 잤고, 악몽을 꾸는 널 계속해서 안아 줬어. 그런데 이제 서울에서처럼, 똑같이 사제 관계로 돌아가자고? 난 못해. 넌 이미 나한테 선생님이 아니라 여자야.”
“이러지 마.”
“왜? 이러면 왜 안 되는데?”
예상했던 반응인 듯, 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정윤은 자꾸만 심장이 뛰어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무슨 감정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두려웠다. 너무 두려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네 제자라서, 네 살이 어려서, 학생이라서, 이런 생각하지 마.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차현이라는 남자만 생각하면 안 돼?”
(중략)
어디선가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서는 중국이 참전한 뒤 엄청난 인구로 밀고 들어오는 인해전술 때문에 전선이 자꾸 밀리고 있다는 불안한 소식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이정윤.”
기차는 무심하게 계속 달려서 벌써 사람들이 도착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슬슬 짐을 챙기고 있었다.
“사랑해.”
정윤은 문득 그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느 장소에 있든, 어느 시간에 있든, 전쟁이 끝나든 안 끝나든, 그 어느 역사 속에 있을지라도.”
정윤의 이유 없는 두려움을 아는지 현이 힘주어 말했다.
“언제나 내 선택은 너야.”
(중략)
“그래도, 둘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저는 그 길을 선택할 거예요. 수많은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들은 감수할 수 있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저는 믿거든요.”
정윤의 눈이 다 식어 버린 커피잔을 향했다.
“현이는 훨씬 전부터 저만을 선택해 왔어요. 저는 늘 무서워하고, 피하고, 다 알면서 모른 척하고 그랬거든요. 이번만큼은 제가 현이를 선택해 주려고요.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시간에서든. 그리고 현이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아 줄 거라고 생각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