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기억을 잃고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뜨게 된 엘리카.
그녀는 자신의 몸이 다른 사람에게 빙의됐다고만 생각했는데.
“모시러 왔습니다, 아가씨.”
척 봐도 성격 더러운 미친놈이 데리러 왔다고 하질 않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더니 모르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면 된다는 식으로 일말의 자비도 없이 사람을 굴리지 않나.
“괜찮을 겁니다. 기억이란 건 때론 머리보다 몸으로 나타날 때도 있어서요.”
차라리 그래도 그들이 나았다. 내 앞에 서 있는 은발의 도련님에 비하면 말이다.
“나는 네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어. 모든 것을 다 잊어도 다시 웃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하게 말이야.”
봄에 불어오는 바람도 이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만약 이것이 성인 남녀의 밀회였다면 이보다 절절한 사랑 고백이 따로 없겠다 싶을 만큼.
루비보다 더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청초하게 휘어진 채 나를 향한 진심이 절실하게 드러났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나는…. 이곳은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거든.”
내가 없으면 언제든지 나락에 떨어질 거라는 저 눈빛.
어쩐지 이 상황이 마냥 낯설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을 버리지만 말아줘.”
…어쩌지? 아무리 봐도 진심인 것 같은데.
도망치고 싶어도 그조차 못 가게 만드는 저 상냥함이, 기억을 잃었어도 느낄 수 있는 저 애틋함이 나를 도망갈 수 없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