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거야, 당신은.”
까칠한 천재 화가, 공재연.
처음으로 믿었던 사랑이 남긴 건, 쓰라린 배신뿐이었다.
다시는 사람도, 사랑도 믿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남자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나 그쪽 옆에 있어도 됩니까?”
태평양 같은 오지랖을 가진 의사, 지태이.
남을 도와주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것 같은 못 말리는 영웅 증후군.
처음엔 분명 동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심으로 그 여자를 지켜 주고 싶어졌다.
한겨울처럼 차갑기만 하던 그들의 마음에 스며든 따사로운 봄 같은 사랑.
잡고 싶다, 우연히 찾아온 이 봄을.
- 본문 내용 중에서
“그럼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나 그쪽 옆에 있어도 됩니까?”
또다시 누군가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잡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그래서 무심결에 그 말이 터져 나와 버렸다.
“미쳤어요?”
꽤 오랜 침묵 뒤에 재연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 것 같다. 밤하늘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재연의 얼굴은 벌써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힘을 주려 해도 일어서지지 않던 다리가 어느새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애써 아니꼬운 듯 그를 바라보며 얼른 집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태이가 재연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그녀는 억지로 그의 손을 떼어 놓으며 시선을 주었다.
“당연하죠. 우리 첫 만남이 그리 좋지 않았잖아요?”
태이는 문득 그 말에 엘리베이터에서의 첫 만남이 떠올라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재연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웃겨요?”
톡 쏘는 재연의 말에 태이는 웃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럼 울까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버럭 소리치는 재연의 모습에 태이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재연은 미친 사람 보듯 그를 흘기곤 얼른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지만 태이는 그녀의 뒤를 놓치지 않고 졸졸 따라갔다. 재연이 얼른 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하려 하자 태이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돌려세웠다.
“나랑 사귈래요?”
“돌았어요?”
“미쳤어요, 돌았어요, 말고,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줘요.”
“우리 서로 안 지 겨우 몇 주도 안 돼요. 얘기를 나눈 적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 무슨 감정이 생겼다고 사귀고 말고를 논해요?”
“시간이 뭐가 그리 중요해요. 내가 지금 공재연 씨가 신경 쓰이고, 계속 옆에 있고 싶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단순히 옆에 있고 싶고, 신경 쓰인다는 이유로 사귀어요?”
“그거 말고도 더 이유가 필요해요?”
“당연하죠!”
재연이 목청을 높이며 태이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서 문을 닫으려 했지만 태이가 손으로 단단히 현관문을 붙잡아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거 당장 안…….”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면 내가 만들어 볼게요.”
평소와 다르게 조금 낮은 어투로 태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숨을 죽인 사이 그가 말을 이어 갔다.
“그 이유가 납득이 되면 그때는 내 고백,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태이는 잡고 있던 현관문을 조심스레 놓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곧이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태이는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상하게 화끈대는 뺨과 요란한 심장 소리에 제정신을 차리려 연거푸 도리질 치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