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못 잊을 만큼 생각이 나면 그때 만나요, 우리.”
“어디에서요?”
“이 서점이 좋겠네요.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 내가 생각나면 이곳으로 와요. 나도 그렇게 할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봄이 곧 올 거예요. 잘 지내요.”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는 일들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해지는 일들이 있다.
어느 겨울, 지예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별은 후자에 속했다.
지예의 사랑은 그해 겨울에 멈춰 서 있었다.
흐릿해지지도 않고, 잊히지도 않는 사랑은 긴 겨울밤을 덮는 애상 같아서, 늘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겨우내 내린 눈이 그 서늘한 그늘에 쌓인 채 1년 내내 녹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희미해질까.
언제쯤이면 아득해질까.
같은 생각을 곱씹으며 지나온 시간이 어느덧 5년이 넘었다.
잃어버려야만 알게 된다,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지예와 현준에겐 서로에 대한 사랑이 그랬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히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겨울은 길기만 했다.
우연히 다시 재회한 그날,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그제야 찾아왔다.
겨울 애상을 뒤로한 채.
[본문 내용 중에서]
“다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네요. 우린 이렇게…… 여기 앉아 있는데.”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옹이처럼 가슴에 새겨져서 잊히지도, 희미해지지도 않던 사랑을.
현준이 말했다.
“오늘까지도 후회했어요, 그날 지예 씨를 잡지 않은 걸.”
“잊으려고 생각했었어요. 헤어진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아니라고 해서.”
“잊혀야 잊죠.”
“그러게요. 그게 참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누가 그래요, 헤어진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아니라고?”
“내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날이라고 하잖아요.”
현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첫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지예 씨한테 전화했었어요.”
“나한테요? 번호가 바뀌었었을 텐데.”
“어떤 남자가 받더라고요. 여러 달 전에 휴대폰 번호를 변경했다고 하면서.”
“나는…… 그럴 자신은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다시 만나면 또다시 헤어지게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눈 오는 날만 기다렸어요. 그건…… 현준 씨가 보여 준 여지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었나 봐요. 나, 살짝 비겁한 거 알잖아요.”
“지예 씨가 왜 비겁해요? 내가 아는 지예 씨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이지.”
지예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대면해야 할 현실의 얼굴 같은 건 영영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