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혈탑(血塔)은 피(血)을 지배하고
창궁(蒼穹)은 의(義)를 지배한다.
이십 년 간 변하지 않던 무림의 정세에 묘한 일이 벌어졌다.
한 자루 검이 되어 나타난 사내.
그가 나타나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다.
풍운영웅(風雲英雄) 묵검추(墨劍鎚).
세상은 그를 무사로 만들었고,
그는 세상을 파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스스로 한 자루 검이 되야만 했던 사내.
이십 년 내려온 한(恨)은......
세 마리 전서구와 함께 떠난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텅 빈 하늘......
하나, 거기 아버지가 남긴 無言의 默示가......
풍운영웅 묵검추.
그는 영웅이기를 거부한 영웅이다.
<맛보기>
* 낙척(落拓)의 서(序)
하늘은 잿빛 구름에 뒤덮이고 있었다.
낮은 하늘에서는 천둥치는 듯한 울음소리가 그르렁거렸기에, 머지않아 큰 눈이 내릴 듯 여겨졌다.
모든 게 춥고 음산한 강호(江湖)의 납월(臘月).
머지않아 해가 바뀌는 계절,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은 강호육백주(江湖六百州)의 대도(大都)답게 번잡한 분위기에 휘말리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거위털 같은 회색 눈송이를 하나, 둘 내어 비치기 시작할 때.
꼬곡- 꼭- 꼭-!
거리 모퉁이에서는 닭싸움이 벌어지며 왁자지껄거리는 소리가 일대를 소란스럽게 했다.
일명 투계희(鬪鷄戱).
독이 잔뜩 오른 두 마리의 투계는 빙 둘러모인 관중들 가운데에서 부리와 발톱을 세운 채 숙명의 적수를 쪼아 대고 할퀴어 댔으며, 닭의 피가 치솟는 가운데 은자(銀子)를 건 사람들의 눈에는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죽여 버렷!"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란 말야!"
"독표(毒豹), 지면 안 돼! 은자 일곱 냥을 걸었단 말야. 독표, 관우(關羽)를 죽엿!"
주먹을 불끈 쥔 채 소리를 쳐 대는 사람들. 그들은 눈송이가 꽤 굵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살을 한 조각 한 조각씩 저미어 내는 삭풍(朔風)이 없을지언정, 정녕 겨울은 깊을 대로 깊은 것이다.
"과거 초당(初唐) 시절, 사걸(四傑)이라 불린 네 명의 시인(詩人) 가운데 으뜸인 왕발(王勃)은 왕자(王子)들의 투계희를 비웃다가 영왕(英王)의 노여움을 사서 폐직당했다는 고사가 있지."
그는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만큼이나 흰빛의 유삼(儒衫)을 걸친 채 걸었다.
그의 걸음은 등왕각(騰王閣) 쪽으로 이어진다.
창백한 뺨에 굳게 다물어진 입술,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그의 용모는 고독하고 암울해 보였다. 그리고 매우 고집스러워 보이는 용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