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모든 일에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삼무철, 이재준.
대책 없는 돌발의 아이콘, 고다정.
그녀와의 거짓말 같은 만남이 반복되면서
완벽했던 그의 인생에 한 획을 긋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투자전략기획팀의 총팀장인 그와 신입 사원인 그녀.
다시 만난 악연이 어떤 우연과 찰나의 영원함으로 이어질지…….
그녀와 엮이는 순간 그의 계획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주도면밀한 생각은 어느새 그 안에 숨어 있는 본능과 원초적인 감정을 깨우기 시작했다!
본문 내용 중에서
“그렇게라도 해서 선배가 날 바라봐 준다면.”
“좋아, 그렇게 구걸이라도 해서 바라봐 주길 원하면 그 끝이 어떤지도 확인시켜 줘야겠지. 그럼 네가 더욱 비참해질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그래도 굳이 원한다면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에 확실하게 느끼게 해줘야겠지?”
순간 재준의 표정이 지독할 정도로 잔인해졌다. 저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폭력성과 금수 본능의 잔인함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선배…… 흡!”
재준은 거칠고 빠르게 손을 뻗어 은정의 얼굴을 확 잡아당겨 키스했다. 거리낌 없이 과감하고 저돌적으로 입술이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벌어진 입 사이로 혀와 혀가 맞닿았다. 그리고 확인하듯이 이어지는 진한 혀의 부딪침에도 불구하고 재준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감각에 피식하고 헛웃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계단 아래에서 숨넘어갈 듯한 헉, 하는 작은 비명이 들려오자 재준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지면서 그쪽으로 빠르게 향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놀란 눈동자와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 저만큼 계단 아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커다란 눈동자에 박힌 유리알 같은 반짝임이 재준에게까지 와 닿는 느낌이었다.
뭘까, 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감정의 쏠림은?
재준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은정의 입술을 훔치면서도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질 듯이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계단의 거리감이 묘한 몽상처럼 아련하게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이 상황에서도 은정이 입술을 활짝 열고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잡자 그제야 재준이 계단 아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거칠게 은정을 떼어 냈다.
“하아…… 서, 선배.”
“봐. 나는 이렇게 너에게 아무것도, 무엇도 느끼지 않아. 그래도 네가 그렇게 원하면 키스뿐만 아니라 의미 없는 섹스까지도 확인시켜 줄 수 있어. 다만, 구걸한 다음에 네가 느낄 비참함과 좌절은 네 몫이고. 그다음 너와 나는 선후배뿐만 아니라, 사내에서도 부딪치면 어느 한쪽이 그만둬야 할 만큼 껄끄러워지겠지. 그래도 괜찮겠어? 그래도 원한다면 지금 당장 끝까지 제대로 확인시켜 줄까?”
결국 재준은 모멸감이 느껴지는 잔인한 발언으로 은정에게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그에 대한 환상과 미련의 잔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말로 그의 눈빛에는 남자로서의 원초적 욕구조차 없었고, 무엇조차 느끼지 못하는 눈빛의 담담함이 질릴 정도로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흐윽! 선배, 진짜 잔인해요!”
결국 은정은 서러운 눈물을 터트리며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 감정 가지고 간 보는 게 더 잔인하지 않아? 나중에 후회할 짓은 하지 마라.”
“선배님, 진짜 나빠요!”
“아무리 그래도 어디 가서 사랑을 구걸하진 마. 너 자신의 가치는 네가 만드는 거다.”
“끝까지 잘난 척은!”
벌컥! 탕!
비상구 문이 시끄럽게 열리고 닫히는 문소리를 끝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이 잠식해 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재준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에 묻어 있는 타액을 손가락 끝으로 스윽 닦더니 저 아래 계단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이, 거기.”
그의 나지막한 한마디가 공명이 울리듯이 계단에 퍼지자 저 아래에 서 있던 그녀가 움찔하면서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친 순간, 재준은 정체 모를 이 내밀한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가만히 손을 들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또각또각.
곧이어 그녀가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 한 발짝씩 계단을 올라오는 구둣발 소리가 흡사 그의 심장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그의 심연 어딘가를 푹 찌르는 것처럼 너무 맑고 투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