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내 안의 괴물이 상처를 비집고 나왔을 때,
아빠를 빼앗은, 엄마의 목숨을 앗아 간 그 여자가 싫었다.
그녀의 딸, 가식적으로나마 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피붙이가 싫었다.
넝마가 된 내 마음처럼 그들의 마음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는 복수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내 곁에 남아 있던 따뜻한 사람의 품을 버렸다.
사랑보다 값진 소중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이 다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던 나는 그것의 뼈아픈 대가를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자유를 제안했고, 그는 거기에 더해 성실을 요구했다. 복수를 위한 밀회가 시작된 순간, 심장이 퍼덕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외면했다.
어느새 거대하게 자라 버린 괴물에게 내 몸을 내주기로 작정했으니까.
그렇게 괴물에게 잠식당해 내 감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 책 속에서
“그러니까 그 말은 우리 두 사람이 격렬하게 즐겨 왔던…… 정사가 더 이상 흥미롭지 못하다는 말이군요?”
“그래.”
짤막한 승호의 답에 은진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큼하다 생각했던 웃음은 이제 어디에서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본능이 이성보다 더 우선일 수는 없지요. 당신의 이성이 이 관계가 흥미 없어졌다 말한다면…… 좋아요. 이성이 본능을 허락했기에 열정의 세계까지 마음껏 갈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의 이성이 이 관계가 재미없어졌다 말한다면, 당신은 이제 우리 두 사람의 정사에서 더 이상 어떤 느낌도 가질 수 없겠지요.”
이처럼 반듯하고 차분한 그녀는 재미없다. 불꽃처럼 열정적인 그녀와 이성적인 대화를 하는 게 낯설었다. 승호는 그동안 그녀를 얼마만큼 알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다른 남자와 서로 손을 깍지 끼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 따윈 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처럼 논리 정연한 모습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좋아요. 가볍게, 산뜻하게. 그만 끝내죠, 뭐.”
자유연애. 원래 그것은 누구 한 사람이 끝내고 싶어지면 끝나는 것이다. 어떤 권리나 권한도, 한 조각의 구속력도 가지지 못하는 게 자유연애이다. 분노를 느낄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분노가 느껴진다. 의도적인 접근이었음을 확신했던 그날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한 분노였다. 그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좋아! 가볍게 끝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