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신의현 씨의 청혼이 유효한지 묻고 싶어요.”
“무슨 뜻이야?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
“나와 결혼할 의사를 아직 갖고 있는지 물었어요.”
그와 그녀는 서로를 사랑해서가 아닌 필요에 의해서 결혼한다.
그리고 영원히 타인일 수밖에 없는 부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그녀에게 말한다.
“우리, 여느 부부처럼 살아보자.”
<본문 중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현의 옆자리에 놓인 교은의 가방에서 ‘엘리제를 위하여’가 흘러나왔다.
의현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알아서 끊겠지.’ 하며 본인의 휴대폰을 쳐다봤다. 아무 일 없는 듯 의연하게 주식현황을 확인하다가 미묘한 낌새를 느끼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주위에 앉아있는 배불뚝이 산모들이 ‘얼른 받아요.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르잖아요.’라는 눈빛으로 의현에게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공교롭게 주목을 받은 의현은 가만히 목을 고르며 자신의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담았다. 마지못해 교은의 휴대폰을 꺼내고 액정을 들여다본 찰나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벨소리가 그쳤다.
아줌마들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조금만 더 견뎌볼 걸 그랬나?
그런데 휴대폰 액정을 주시한 의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른 여자에게 장가 간 놈이 뭐하자는 거야?’
의현은 부재중으로 찍힌 준영의 이름을 바라보며 기분이 딱 그랬다.
똥 밟았네.
아니나 다를까 아줌마들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모른 척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고결한 아줌마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지만, 그녀들의 드넓은 오지랖 덕분에 의현은 굉장히 더러운 기분을 맛보고 말았다.
이러면 삐뚤어질지도 모르는데.
행여나 삐뚤어질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마침맞게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의현은 제 것인 양 자연스럽게 ‘잠금 설정’이 되어있지 않은 휴대폰의 액정을 터치하며 음성사서함을 연결했다.
[교은아, 나야. 통화가 되지 않아서 메시지 남겨. 다름이 아니라 대민투자증권 본부장과 네가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야?]
따지는 것처럼 캐묻는 준영의 음성이 바르르 떨렸다.
[회장님께서 떠미신 거지? 그렇지? 회장님은 예전부터 신의현 본부장을 사윗감으로 점찍어놓은 거 같았었어. 그게 이런 식으로 현실이 될 줄은…….]
준영은 흐느낌 같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교은아. 널 책임지지 못하고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혼자 남은 널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 모쪼록 네가 하나만 알아 줬으면 좋겠다. 내가 널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거…….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미안해.]
준영의 음성메시지는 그렇게 끝이 났다.
메시지를 경청한 의현은 미동 없이 앉아서 속으로 생각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어야 할 놈이 웬 진상질인지. 정략결혼을 하게 된 상황이 가슴 아프다는 건 무슨 개소리인지. 버젓이 마누라가 있으면서 어디다가 감히 사랑타령인지.
구토가 나올 듯 속이 거북해진 의현은 지지리도 우유부단한 준영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입덧하는 산모처럼 더부룩한 속을 다스리며 간략하게 한 마디로 함축해서 뇌까렸다.
“미친 새끼.”
의현은 준영이 눈앞에 있다면 인정사정없이 죽도록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주먹이 부르르 울었다.
교은과의 결혼을 앞둔 의현은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준영의 존재가 더할 나위 없이 거슬렸다.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준영이 미련스럽게 현실을 망각하며 언젠가 다시금 교은을 찾아올 것 같은 불길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했던가?’
의현은 준영과 교은이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에 오장육부가 꼬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알아뒀으면 좋겠는데. 내 품에 들어온 건, 내 스스로 놓아주기 전에는 함부로 넘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넘봤다가는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할 테니까.’
의현의 눈가가 오싹하게 경련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맞이한 준영과 교은의 애틋함이, 감성보다 이성이 강한 의현의 냉철함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