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내 울타리 안에서 네 마음껏 놀아.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해. 널……, 숨 막히게 가두어 두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가 그를 우상처럼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열렬하게 뜨겁고, 그와 시선이 맞닿으면 얼굴이 붉게 물든다는 것도 안다. 우상을 향한 마음은 어느 순간 변절하기 쉽다. 소녀 시절엔 얼마든지 더 멋진 우상이 나타나면 바뀌니까 말이다.
‘너에게 우상으로 기억되기는 싫어. 날 열렬히 사랑하고, 원하도록 해.’
그녀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내렸다. 뜨거운 입술이 찬 이마에 닿으며 보이지 않는 각인을 남겼다.
‘그러니 기다려.’
언제……. 우리가 그렇게 친근했던 사이였나요. 내 우상이 당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그리고 그걸 우습게 생각했고. 시간이 지났는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죠.
이 오만한 남자에게 만족감을 안겨 주기 싫었다.
정은은 건영을 잔뜩 노려보았다.
“내가 기다렸다고 누가 그래요?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해요?”
“아니야?”
그의 도전적인 눈빛에 정은은 순간 아찔해져 눈을 감았다. 곧바로 눈을 뜨고 건영의 눈을 노려보았다.
“난 기다린 적 없는데?”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남자 서건영과 잊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유정은.
다시 재회한 두 사람은 어긋난 그들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 본문 중에서
“문 열어.”
차가운 분노를 담고 있는 건영의 목소리에 순간 정은의 몸이 경직됐다. 강철 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그녀가 서 있는 것이 다 보이는지 건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감정을 억누른 낮은 목소리는 그가 지금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하고도 남았다.
“…….”
“안 열지. 유정은 좋은 말로 할 때 열어.”
띠리리.
안쪽 흰색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건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밀고 들어오는 속도에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정은은 건영과 벽 사이에 갇혀 버렸다.
탁-
장신의 건영이 그녀를 작은 체구를 집어 삼키듯 한 손은 그녀의 허리 뒤에 나머지 한 손은 머리 위 벽을 짚었다.
찰칵. 잠금장치가 닫히는 소리가 건영의 검게 가라앉은 시선과 함께 그녀를 가두었다.
쿵. 쿵. 쿵. 쿵.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건영의 귀에도 들릴 만큼이나 크게 콩닥거렸다. 입술을 깨물며 침을 삼키는 정은을 건영이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허리쯤에 있던 손이 움직이더니 그녀의 턱을 받쳐 고개를 들게 했다. 그의 시선을 회피하려는 정은의 시도는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그의 손에 의해 실패했다. 이글거리는 건영의 눈빛에 사로잡혀 정은은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듯 노려보는 눈빛에 숨이 막혔다.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오, 오, 오빠.”
“지금, 도망치는 거야? 나한테서?”
“그, 그런 게 아니라…….”
“사랑한다 고백했더니 도망을 가?”
온몸으로 분노를 뿜어내는 그에게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건영을 직접적으로 부딪치기 전에 이미 그녀의 독립은 오래전부터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그 시기가 하필 이렇게 겹치게 되었을 뿐. 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었다.
“내가 기다리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