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단성: 손끝 야물고 이목구비부터 마음가짐까지 참으로 단아한 처자.
가난했고, 외로웠고, 상처도 많다. 그렇기에 더욱 차분하고 담담해 헛된 꿈을 꾸려하지 않는다.
유홀: 지독하게 아름답고 뻔뻔할 만큼 오만한 천신.
마음에 들여 놓은 것 없어 누구 보다 강했고 그만큼 위태롭게 살아왔다.
그런데 작은 인간 하나가 그의 무참했던 흑백 세상을 다채롭게 물들여 버린다.
가진 것이 많아도 지키고픈 게 없었다. 유리하면 이용하고 소용없으면 내치는 것이 당연해 별다른 감흥조차 없었다.
그런데 모다 잃어도 지켜내고 싶고, 머릿속 셈이 끝나기도 전에 심장부터 움직이고 마는 상대를 만났다.
“그래도 와. 나한테로.”
그녀는 서늘하게 푸른 달이 품은 간절한 붉은 바람이었다.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고 담지 않는 빈 가슴으로 살자했다. 또다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너무 힘겨우니까.
그런데 특별해져 가고, 간절해져 간다.
“바란다면 바람처럼 흘러가 주실까요. 제게 고이지 않고 그대로 하늘까지…….”
스쳐가는 붉은 바람 한 줄기가 되어도 좋다. 그러니 당신은 여전히 빛나는 푸른 달이기를.
천형을 받아 지상에 떨어진 유홀과 홀로 꿋꿋이 살아가던 단성의 만남.
부르지 않은 계약자와 이미 깨어나 버린 천신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본문 중에서-
내 뭐랬어. 유홀은 저 멀리서 보이는 형체를 확인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느려 터져서는…….”
엉망이 된 꼴로 주저앉아 가쁜 숨을 고르는 단성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 속도감을 견디지 못한 때문일까. 이내 심장이 죽을 것처럼 아팠다. 제가 한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조각을 낸대도 이렇게 고통스러울 것 같진 않았다. 느껴본 적 없는 격통이 온 몸을 산산 조각 내 눈시울마저 뜨겁게 만드는 것이리.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가 불렀다.
“단성.”
후두둑 쏟아지는 빗줄기가 이름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듯 했다. 유홀은 뒤를 돌아 저를 확인하는 단성을 보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얼굴을 본 단성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그러다 이내 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가만히 다가간 유홀은 말없이 그런 단성을 끌어안았다. 아프다. 숨 쉬는 게 괴로울 만큼 고통스럽다. 허나 그것은 제 상처 때문이 아니다. 비틀어진 팔로도 떨어뜨릴까 애써 보듬고 마는 이 여자 하나 그래, 단성 때문에 모든 감각이 솟구쳐 비명을 지른다. 유홀은 갑갑해진 심장을 뜯어내듯 꾹 움켜쥐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생 처음 원하는 것, 희원(希願)이 생겼다.
선홍색 피가 넘쳐 내리는 웅덩이에 서서 그는 오로지 저만을 부르고 있었다. 천 마디 말보다 그 모습이 가슴을 들쑤셨다.
잡지 마. 그런 모습으로 붙잡지 마요. 나는 이제 그만……. 소리 없이 절규하며 뿌리쳤지만, 한 걸음 내딛으면 잡아서고 도망치려 하면 안아주는 유홀 때문에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째서요, 당신이 어찌 하여 나보다 더 아파하는 겁니까?
당신이 어찌 내 심연에 들어와 통감하며 슬퍼하세요?
살고 싶어지잖아. 이렇게 막막하고 무서운데 또 바보처럼 살아보고 싶잖아요.
고단하고 지친 나를 자꾸만 일으켜 세우면서 결국, 당신도 떠날 거잖아요? 그런데 왜…….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처럼 소리까지 내서 엉엉 울고 말았다. 유홀이 저를 세상 가장 귀한 사람인양 품에 안아주었을 때는 가슴 밑바닥에서 끌려나온 외로움마저 들켜버렸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은 가슴에 동그랗게 녹아들어 빛났다. 파랗게 아롱지는데 자꾸만 점점이 붉게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