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연작 : 거짓말 숨기기
서도진: 검사. 33세.
도저히 미치치 않고서야 그 어린 아이에게.
몇 년이라고 세고 싶지 않은 날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점점 맘이 조급해진다. 그 아이가 그녀가 되어서도 그를 괴롭힌다. 매일 내 가슴에서 살고 있다.
장지안: 시사교양국 피디. 27살.
처음부터 너무 큰 사건을 맡았다.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찾다 보니 그가 옆에 있다.
나, 아직 그 앞에 서면 가슴이 뛰니? 그런데 억울하다. 왜 나만 힘들지?
주위에서 날 찾는 이, 누구 없나. 이렇게 하염없이 빠지는 건 억울한데!
처음엔 단순한 제보였는데 일이 점점 커져서 범죄 수사가 되어 버렸다. 지안은 도진의 도움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 지어야 했다. 어린 여자 아이의 사랑이었는데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버린 지안에게 도진은 이젠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거짓말 숨기기' 주인공이었던 바른과 도영의 딸, 지안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에 힘입어 에필로그에서 멈췄던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합니다.
-본문 중에서-
“핸드폰 줘봐.”
“핸드폰요? 어디 전화할 데 있으세요?”
지안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도진이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자, 내 번호야. 다음부터는 도움이 필요하면 시안이한테 연락하지 말고 나한테 바로 해. 그 정도는 내가 해 줄 수 있어.”
“진짜……그래도 돼요? 제가 법적으로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렇지 않아도 친구 중에 형사가 있는데 걔한테 자문을 구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오빠를 만나서 제가 얻는 게 참 많네요.”
“지안이는 연애 많이 해 봤어?”
그가 도와주겠다는 말에 깔린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건지 고마워만 하는 지안을 보자 도진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7살이나 되었으면 이런 남자들의 심리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저요? 글쎄요……. 그다지 생각나는 게 별로 없는 거 보니까 연애라고 할 만한 연애는 없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하니까 제 인생도 별로 재미가 없었네요. 아, 맞다. 좀 전에 형사 친구 있다고 했잖아요? 걔하고 미팅하고 한 2개월 정도 사귄 게 그나마 연애였던 거 같아요.”
“여형사가 아니고 남자였어?”
지안이 자문을 구하려던 형사가 남자였다는 그녀의 말이 그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창피하지만 아까 갔던 경찰서에서 마주친 거 있죠?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런데 그 친구가 제 맘도 모르고 자기가 일이 있어서 나가는데 바로 돌아와서 도와준다지 뭐예요. 생각해 보니까 오늘 오빠가 절 여러 번 구해 줬네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
들어 올린 그의 잔에 소리 나게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지안이 얘기했다.
“그 친구한테는 어떻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경찰서에 연락해서 알아내려고?”
왜 그게 궁금한 건지 도진은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
“그게 그 친구한테 전화 번호 가르쳐 줬거든요. 혹시 몰라서.”
“지안이는 아무한테나 막 번호주고 그래?”
지안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도진이 조금 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네?”
“……..”
도진은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지금 심정 같아서는 지안의 전화번호를 바꿔버리고 싶었다.
“친구라니까요.”
지안은 조금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그를 보면서 혹시 지금 그가 질투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다 스스로의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남녀 사이의 친구는 엄마 배속에서 나오는 순간 없어지는 거야.”
“글쎄요? 뭐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은 틀린 거니까요.”
도진은 생각과 다르게 나가는 자신의 말을 막을 방법은 침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진은 지안의 대답을 듣는 순간 자신이 참 찌질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 사이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술을 마셔도 취한 적이 없었던 그와 가히 대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지안도 술을 잘 마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마시는 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지안에게 무리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진은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고 지안을 데려다 주기 위해 길가에 나섰다. 앉아서 술을 마실 때까지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안이 약간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취기가 있나 봐요. 그래도 아직은 정신이 있으니까 다행이네요. 히히.”
천천히 걸어서 자신을 기다리는 도진의 옆으로 오더니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면서 얘기했다. 밑에서 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의 쳐다보는 지안을 보자 도진은 자짓하면 그녀의 입술에 키스 할 뻔했다. 여자의 키로는 작지 않은 166cm 인 지안이지만 186cm 가 되는 그에게는 작은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자.”
“어? ……오빠…….”
지안은 자신의 손을 잡는 도안의 손길에 심장이 어디에서 뛰는지 모를 정도로 온몸에서 심장소리가 들려 왔다.
“…….”
도진은 대답도 하지 않고 지안의 집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지안이 살짝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도진이 지안의 손에 깍지를 끼워 아예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취기 있다며 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여전히 앞만 보고 걸으며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행복한 기분도 십 여분을 걸어 지안의 집이 보이자 아쉬움으로 바뀌어졌다. 둘 중 누가 더 아쉬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도진은 벨을 눌러 주고 지안의 손을 놓아 주었다.
“고마워요. 오빠. 다음엔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너니까 도와준 거야. 시안이가 부탁해서 도와준 게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한 게 너라서.”
“…….”
“훗. 들어가야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도준은 지안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그녀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층 지안의 방에 불이 켜지는 걸 확인하고 터덜터덜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그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