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세상에 당연한 일은 절대 없다고 믿어 왔던 28년 인생이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인과라는 것이 존재한다 여겨 왔고, 또 그렇게 봐 왔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걸까. 어째서 인륜대사 중 하나인 ‘결혼’에 ‘당연’이란 단어가 적용되는 걸까. 그것도 하필 나의 결혼에…….
-본문 중에서-
태혁의 입술 사이로 잔잔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말 다 맞아. 그래서 너한테 하자고 하기가 힘든 거겠지.”
“하자니. 뭘?”
“여태까지 말한 거.”
“결혼?”
“어.”
“태혁아. 너 진짜 이걸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아버지들끼리 어렸을 때부터 장난처럼 했던 말이잖아.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결혼해야 하는 나이고, 마침 짝이 없으니 또 장난처럼 하시는 말이야. 난 네가 왜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돼. 너 똑똑하잖아. 구분 안 돼?”
“똑똑한 거랑 상관없고, 난 너랑 달리 내 마음을 자각한 것뿐이야. 그리고 아버지들끼리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도 우리가 마음 있으면 하는 거지.”
“왜? 그냥 이걸 물어볼게. 왜 해? 너랑 나랑. 결혼을 왜 하냐고.”
다인이 답답함과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가로등에 비쳐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에게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잇새로 새어 나오던 한숨이 허공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태혁은 바람에 흐트러진 자신의 앞머리를 쓱쓱 쓸어내렸다.
“좋아하니까.”
“…….”
“난 너 좋아서 하고 싶어. 이 결혼.”
다인의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
…… 중략
“하자.”
“뭘.”
“결혼.”
“야, 너 진짜 그만해.”
“너 나 끈질긴 거 알지. 하나에 꽂히면 될 때까지 파는 거.”
잘 알고 있다. 내 옆에 서 있는 이 잘생긴 미친놈이 한 가지에 미치면 무섭도록 그것에만 열중하는 타입이란 걸. 그래서 태혁은 공부도, 운동도, 게임도, 요리도 뭐든지 끝을 보고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그럼 혹시 키스도……? 키스도? 다인은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조금 전 상황에 제 뺨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시작이 어렵지, 한 번 밖으로 뱉은 말 반복하는 거 안 어려워.”
“그래도 싫어.”
“넌 내가 안 내키나 보네.”
“아니. 객관적으로는 정말 훌륭한 남자지.”
“근데 왜 싫어.”
“남자로서의 감정이 안 느껴지니까.”
“있는데 모르는 거지.”
“단정 짓지 마!”
“너도 단정 지었잖아.”
“그건 말이야.”
변명을 찾던 다인은 씩 웃으며 말했다.
“혹시 네가 남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난 여태껏 살면서 네 옆에 여자가 붙어 있는 꼴을 못 봤거든.”
“넌 XY냐.”
“그런 말이 아니라…….”
“나한테는 네가 계속 여자였어.”
“태혁아.”
“이제 농담 따먹기 그만하자.”
태혁은 걷기를 멈추고 서서 애절한 어투로 설명하는 다인을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아, 정말 난감하네. 다인은 자신의 돌주먹으로 머리를 쿵쿵 쥐어박고는 멀어진 태혁의 뒤를 쫓아갔다. 집 앞에 도착해 다인이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돌아서서 태혁을 바라보았다.
“설레긴 했어. 근데 설렘이란 건 꼭 좋아하는 감정이랑 붙어 다니지는 않아.”
“그래서.”
“그러니까 그것만으로는 나 역시 너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 태혁아, 너도 알잖아. 내가 결혼이란 것에 얼마나 환상을 가지고 있는 여잔지…….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도 중요하지만 1순위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야. 빈대 코딱지처럼 작은 초가집에 살아도 꼭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태혁은 말이 없었다.
“네가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면 결혼하자 쉽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야.”
“이다인.”
“응.”
“확인하자. 같이.”
“뭘.”
“각자의 마음 확인해 보자고.”
“어, 어떻게…….”
태혁은 고백을 할 때와 비슷한 눈빛으로 다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나랑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