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티끌 하나 없는 피부와 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까지.
명서에게 희고 깨끗하다는 건 숙명인 동시에 저주였다.
짙고 황폐한 어둠의 나락, 휴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다른 무엇보다 새까맣고 가파르게 날카로워
스스로 나락을 뚫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태초의 존재에게 이름과 사명을 받아 신이 되었다.
“신은 어떤가요? 그 자체로 완성되어 행복한가요?”
불행하고 남루한 인간이 묻고, 흐트러짐 없이 고귀한 신은 답하지 못했다.
허나 이 하나만은 알았다. 자신은 명서라는 계집에게서 답을 찾고 있다.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이 좋은 분인지 나쁜 분인지…….
뭐, 결국 저 좋을 대로 생각하기야 하겠지만.”
“내 어떠한지 모르겠다고 하였지. 답해 주마.
나는 완벽히 어둠에 속하는 자이니라.”
인간 계집은 자신과 놀랍도록 닮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또 완벽하게 달랐다.
그래서 꼴 보기 싫고, 그러면서 완벽하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휴는 스산하게 웃으며 희다 못해 은빛이 흐르는 명서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고요한 숲을 뒤흔드는 계집의 웃음소리, 달콤한 숨 냄새, 반짝이는 눈동자.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지 않아도 명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계집을 궁금해 했던 거로구나, 이 내가.
가늠할 수도 없는 어둠의 사내와 빛처럼 날아온 인간 소녀라.
모순되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어둠 안에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모를 일이다.
저 작은 것에 휘둘리는 일 따위 결코 없을 것을 자신하였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