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그들을 다시 본 건 호텔의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난 그 여자애의 얼굴을 정면에서,
그것도 가까이에서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여자애의
얼굴에서 다른 얼굴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어릴 때 단 한 번 봤을 뿐이고,
그 뒤로 만난 적도 없어서 확신할 순 없었지만 놀랍게도
나는 그 아이가 분명하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앞을 보고 서면 여자애를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비스듬하게 섰다.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여자애들은 자라도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여자애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린 시절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드러난 목덜미에서 반짝이는 유리나비!
크리스털로 만든 투명한 나비가 펜던트로 달려있는 가느다란 체인의 목걸이였다.
그 아이가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는 순간이었다.
유현빈.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이가 남기고 간 사진 한 장을 통해 얼굴과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저런 초라한 목걸이를 하고 있다니.
저건 내가 보육원에 맡겨질 때 유일하게 몸에 지니고 있던 거였다.
그런 걸 난 왜 그토록 쉽게 저 아이에게 주었던 걸까.
“이런 날 남자친구랑 스위트룸에서 야경 보면서 둘만의 파티를 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매니저에게 둘만의 파티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정말? 언제 그런 준비까지.”
“처음부터 당신이 원한 거니까.”
그런 그렇고. 왜 저 아이가 여기 있는 걸까?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왜 이런 날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걸까!
그 생각에 미치자 극심한 배신감 같은 것에 사로잡혀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 뭐……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니까. 유달리 어릴 적 그 아이가 티 없이 맑아 보였다는 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저 아이가 아기 천사 같단 느낌을 받은 것도 단지 나 역시 어려서 그런 착각을 한 거겠지.
하지만 내 목걸이를 하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는 사실은 역시 불쾌했다.
당장이라도 목걸이를 잡아 뜯고 싶었지만 내 존재를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면 그 뿐이었다.
다신 만나지 말자. 천사 같은 아이를 알았다는,
내게 있어 몇 안 되는 행복한 기억을 한 순간에 짓밟아 버린 그녀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의도적으로 나와 동행한 여자에게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는 동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놀란 그녀가 미처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잔뜩 긴장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지금 너에게 키스하고 있는 거다.’라는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내 의도대로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같이 온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역시…….
“내게 키스 받는 기분이 어땠지?”
날 스쳐 지나가는 그녀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가 긴장했다. 내게 키스 받는 착각에 빠져있었던 게 틀림없다.
하아, 허탈한 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렇군. 저 아인 예전의 그 천사 같은 아이가 아니다.
남자와 호텔을 드나들면서 다른 남자의 시선만으로도 쾌감을 느끼는,
남자를 잘 아는 몸을 가진 여자일 뿐이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다신 만나지 말자.
너 만큼은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가자.”
여자가 내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혼자만의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룸으로 향하면서 여자가 수줍게 말했다.
“그런 키스는 처음 받아 봐. 정말 키스는 달콤한 건가 봐.
정신을 잃을 것 같았어.” “아…….”
나는 그저 빙그레 웃고 말았다.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했겠지,
그 상황에선 당연히.
이쯤에서 그 아이에 대한 추억 따윈 깨끗하게 지워버리자고 마음먹었다. 못 견디게 힘들 때마다 생각나던 그 아이 따윈 이제……
이 세상엔 없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견딜 수가 없다. 견딜 수 없이 그 아이가 밉다.
어째서 내가! 최악의 순간에서도 최악의 선택만은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철없는 그 약속 하나에 의지해,
그 때에 적어도 너한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 치며 최악의 유혹만은 뿌리쳐 왔다!
그런데 넌! ……그래. 우린 다시 만나야 한다.
꼭 다시 만나서 네게도 내가 받은 만큼만! 꼭 그만큼의 절망감을 돌려줄 것이다.
너도 나로 인해 절망감을 느껴 봐야 한다. 마지막 남은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버린 너 따윈, 내게 벌을 받아야 마땅하니까.
안정은의 로맨스 장편 소설 『유리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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