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들을 치죄하는 경우 대개는 뻔뻔한 자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증거를 찾아 들이대는 ‘닦달’은 형조와 사헌부의 고유권한으로 죄 지은자의 주거지에 따라 관할이 달랐다. 그곳이 사헌부나 형조인 경운 중급관리에 해당되나 군인일 경우 중급 장교가 지시를 내리는 게 보통이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건 정조 14년인 1790년 5월이다. 학문을 사랑하는 군주답게 규장각으로 부른 정조는 자신의 오랜 숙원을 관철하기 위해 지평(持平)에 임명하고 사회 범죄꾼의 소탕에 나선다. 사채놀이 하는 사대부들을 비롯해 정순왕후가 운영하는 기생방과 도박꾼들, 역모를 꿈꾸는 소격서 집단 등 곳곳에 기생하는 반정의 무리들을 색출하기 위해 정약용을 불러 중책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정조의 마음에 응어리져 있는 사도세자의 묘역을 조성하기 위해 수원에 천장지를 만들고, 다음 계획에 들어가기 앞서 양반 사대부들의 힘을 빼앗는 비책을 마련하려는 게 <밀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