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내가 줄곧 보고 있었던 것은 헬레나가 아니야. 내 눈앞에 있는 엘리엇 드 프레이튼이지. 다시 말해, 너만 내 말을 따라 준다면 프레이튼 후작가도, 너의 사랑스러운 헬레나도 모두 예전처럼 평온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전해져 오는 왕국의 전설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은 엘리엇은,
어느 날, 자신이 피폐물 소설 속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도 하필 피폐물 여주인공의 오빠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외면했을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햇살처럼 아름다운 여동생 헬레나의 행복을 위해
엘리엇은 미래를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엘리엇은 헬레나에게 집착하여 끝내 그녀를 망가트리는 칼리스 대공으로부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그와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맺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늦었군, 엘리엇.”
칼리스가 비스듬히 앉은 상태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 모습에 엘리엇은 기껏 가라앉은 화가 다시 불쑥 치솟아 오르는 듯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는 태도, 오만하게 치켜뜬 채로 쳐다보는 행동 등 그의 모든 것이 전부 거슬렸다.
“오늘은 표정 관리가 조금 힘든 모양인데,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도록. 이곳까지 온 성의를 봐서라도 그 정도쯤이야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으니까.”
“프레이튼 후작가에 보낸 공문을 철회해 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시겠지만, 후작님께서는 공문에서처럼 불법을 저지른 일이 없습니다. 거짓으로 누명을 씌우는 일은 그만두시죠.”
“그건 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겠지.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건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적어도 그 정도는 말해야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생길 것 아닌가?”
“네,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 듯합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그제야 느긋하던 칼리스의 목소리가 벼린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엘리엇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헬레나, 그녀가 지금 왕국을 떠나 있다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헬레나의 이름이 거론되자, 엘리엇은 자동적으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칼리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에서 황태자 헬리오스의 보호 아래에 있지. 그렇지 않은가? 제국과 엮인다면 내 힘이 닿지 않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서신 정도는 충분히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뜬금없이 꺼낸 서신이라는 말에 엘리엇은 잠시 의아했지만, 곧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래, 풍비박산이 난 후작가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 줄 예정이야. 경이라면 몰라도 구김 없이 자라온 온실 속 화초 같은 영애에게는 너무 큰 시련이 아닐까 싶은데.”
이어진 말에 엘리엇은 뒤돌아섰고, 칼리스는 그에게 천천히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당장 델카르트 제국의 황태자와 맞서는 일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서신을 전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 의심하지 말도록. 아, 지금 다시 돌아온다면 상으로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지. 그 잘난 여동생 헬레나에 관하여.”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엘리엇은 다시 칼리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헬레나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좋아, 착하군.”
칼리스가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나서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리엇은 그 즉시 그의 손을 쳐냈지만, 칼리스는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줄곧 보고 있었던 것은 헬레나가 아니야. 내 눈앞에 있는 엘리엇 드 프레이튼이지. 다시 말해, 너만 내 말을 따라 준다면 프레이튼 후작가도, 너의 사랑스러운 헬레나도 모두 예전처럼 평온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