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스스로를 향한 연민에 휩쓸려 조수석 깊이 몸을 묻었다. 아내의 체향이 둥실 떠올라 후각기로 밀려들었다. 이 차 안에도, 그 호텔 방에도, 남자의 사타구니에도 이와 같은 짙은 향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내의 남자, 남자의 아내. 번뇌할 필요도 없이 폭염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래, 이미 결정이 난 상황을 미묘한 감정에 얽매여 번복할 필요가 없었다. 지독하게 황홀했던 섹스는 이혼의 대가로 치부하면 되는 것이었다. 짙은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감정 따위는 깨끗이 버리면 그만이었다.
심연 깊게 가라앉은 번뇌의 끝자락에서 보닛 위로 두서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독한 폭염, 푸른 원피스, 아내의 향수 냄새, 이혼, 환락 같았던 섹스, 윤이, 윤이…….
“그게 강간이었습니까?”
긴 침묵 후 남자의 기조 없는 억양이 들려왔다.
강간. 섹스. 남자에게 중요한 건 어느 것일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숨을 길게 내쉰 후 조용히 사내의 이목구비를 훑었다. 단정하게 그늘진 미간과 그린 듯 흘러내리는 콧날, 굳게 다물어진 입술. 시선을 들어 무겁게 가라앉은 홍채를 마주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차분한 두 눈에 서려 있다.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남자의 두 눈을 물끄러미 마주보다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보닛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