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들어가는 말
10년 전에 풍운고월겁이라는 작품을 출간했을 때,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설전을 벌이다가 오히려 지기처럼 친하게 된 대구의 한 독자께서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다.
― 요즘 무협만화가 굉장하던데, 만화는 안 하세요?
나는 도서대여점이나 만화방에 자주 가는 편이다. 비록 무협소설을 쓰고는 있지만, 무협소설만큼 만화도 잘 본다. 그만큼 만화를 좋아한다.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요즘 만화방에 가보면 현대물보다 시대물이라고 불리는 무협만화가 득세를 하고 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꽤 오래 전에 만화 스토리를 써보고 싶은 충동과 욕망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협소설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같은 무협이지만 소설과 스토리의 작법이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하는 것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조금도 감추지 않고 그런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니 그 분은 가볍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요즘은 소설도 만화도 너무 가볍고 빠르기만 한 것 같습니다. 영웅문이나 금검지처럼 깊은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요즘 소설이나 만화가 스트레스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순간에 불과하고 읽고 난 다음에는 어떤 여운이 남는 것이 아니라 허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분은 만화 스토리를 쓰겠다는 나를 그런 간접적인 방법으로 책망하고 계셨던 것이다.
독자들의 그런 작은 욕구조차 제대로 풀어주지 못하고 지난 20년 동안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고정의 틀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온통 허점 투성이의 똑같은 글들만 변함없이 양산해 왔다는 생각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독자들의 그런 사소한 요구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는 놈이 어찌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 분께 약속했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가능한 빨리 그런 소설을 써보겠다고. 독자들께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그런 소설을 써보겠다고.
작업실 창 밖으로 며칠 동안 눈부시도록 하얗게 피어 있던 이화(梨花)의 꽃잎들이 바람에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다.
참으로 좋은 계절, 독자제현의 건승을 기원드린다.
孤山書齋에서 啞道人 拜上.